고려왕조 마지막 왕 공양왕의 릉
▲고양시 원당에 있는 '고릉'은 고려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과 그의 비 '순비 노'씨의 능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이성계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후 신진사대부의 세력확장에 이용되는 등 불운하게 생을 마쳤다
공양왕(恭讓王)은 재위한 1389년부터 1392년까지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맡았다. (후에 1392년에 조선왕조를 세움)
▲공양왕릉 위치 원당동 산65-6번지
▲조선왕조의 능이라면 저녁노을에 접근할 수없지만 초라한 고려왕릉은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다.
그는 원치 않는 王位에 올랐지만 4년 만에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저녁노을이 지는 이곳에 왕족이라는 운명으로 태어나 '싫다는 왕위를 억지로 짊어진 '뒤 한참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하는 비운의 부부 묘역에 무심한 듯 금계국은 피어난다.
▲그는 왕위를 잃은 후 처음에는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강원도 간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다시 강원 삼척으로 옮겨진 뒤에 그 곳에서 처형되었다한다. 이로 인해 간성왕(杆城王)이라는 호가 붙여졌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에 위치한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세월에 깎인 석등와 석물들은 왕릉이라기 보다 4대부 묘역보다 더 초라해 보인다.
▲한 王朝의 몰락역사를 보면 씁쓸하다 못해 슬프다. 왕건(王建)이 신라 말 경순왕을 쫓고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여 918년에 새 왕조를 세운 고려도 예외가 아니다. 34대 제왕이 475년간 존속했지만 그 끝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공양왕은 국권을 원나라에게 빼앗긴 채로 전전긍긍을 하다가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파에 최후를 맞는다. 그와 관련된 설화가 이곳에 녹아 있다.
▲공양왕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라는 당시 우왕의 심정을 적은 내용이 적혀있다.
▲이숲이 우거진 곳에 삽살개의 전설이 묻혔는데 우리가 걷는 모든 것이 역사의 현장이다.
▲밧줄로 막아 들어가지 말라는 금줄(禁乼)에서 국운이 다한 고려왕조의 비애를 느끼게한다.
▲공양왕(恭讓王, 1345년 3월 9일 (음력 2월 5일) ~ 1394년 5월 17일 (음력 4월 17일), 재위: 1389년 ~ 1392년)은 고려의 제34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제20대 국왕인 신종의 둘째 아들 양양공의 6대손이다.
6월22일 夏至節 답게 저녁먹고 공양왕릉을 돌아 보고도 아직 햇살이 남아있다. 이제부터 햇살은 점점 짧아 지겠지
그 당당 하던 高麗 王朝의 權勢도 이럴 진데, 우리네 인생 하루하루 노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지금도 온갖 貪慾으로 번뇌하는 것 아닌가?
이제는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궁촌 왕릉을 찾아가 본다. 이곳에는 레일바이크 놀이 시설이 성업 중이다. 걸어 5분이면 갈 수 있지만 누구도 찾아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성계의 집권으로 멸망의 길을 가야하는 고려의 공양왕은 유배 가던 중 이곳에서 두아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보냈다가 불안한 이성계 측이 더 먼 강원도 간성으로 옮기던 중 이곳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권력과 탐욕은 인간의 존엄도 사라진다. 이곳에도 두아들과 공양왕의 세 능묘가 남아있다.
경기도 고양시에 공양왕릉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조에 이곳에서 옮겨온 묘이니 어느 것이 사실적인 묘인지 나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고양시의 묘는 조선왕조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함 이였을 거라면 머리만 가져와 확인하고 그곳에 묻었다는 설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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